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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1. 밀리면 끝장이다! -매서운 칼바람이 불다
지난 길은 돌아보면 낯익지만 서툴렀다. 적당한 때 새로운 길에 자신을 내준 과거는 가끔 짧게, 길게 어긋났다. 그게 ‘인생’이다. 그 길에서 만난 가파른 길은 결코 쉽게 오를 수 없다. 거짓말처럼 그 길 위에서 행운과 마주치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쨌든 가파른 고개를 넘으려면 땀을 흘리며 걷는 수밖에…. 지치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고 다시 내려가고 싶을 때도 있겠지만 결국 올라가 넘어야 한다.
1997년, IMF 외환위기 당시 운영하던 신발공장이 망했다. 그때 나의 시간은 벼랑 끝으로 내는 길이었다. 사업이 부도가 나고, 빚이 산더미처럼 쌓이고, 도망자 신세가 되어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과정은 점점 더 나락으로 내달리는 모양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뒤돌아 다른 길을 선택하고 싶은 마음만 간절했다. 신발공장을 시작하기 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어떤 길이든 나에겐 꽃길이었다.
원래 나는 광고회사를 운영하며 판촉물이니 홍보물 제작 일을 했었다. 학창 시절 잠깐 그림 공부를 한 것이 인연이 되어 시작한 일이다. 그때 신발공장을 하는 친구가 찾아와 아이들 운동화에 그림 그리는 작업을 의뢰했는데, 그게 신발공장을 차리는 데 시발점이 되었다. 친구가 출시한 운동화는 빅히트를 쳤고, 미처 물량을 다 대지 못할 정도로 금세 큰 붐을 일으켰다.
특수물감으로 칠한 그림은 입체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예쁘기도 해 반응이 꽤 좋았다. 신발에 그림 그려 넣을 줄만 알았지, 사업이며 제화업계 돌아가는 판은 전혀 모르는 나도 돈 굴러들어오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마침 신발공장을 정리한다는 데가 있어 얼른 인수해 사업을 벌였다. 이미 불티나게 팔리는 모양을 확인했으니 시작만 하면 대박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사업을 시작하고는 정말 순식간에 돈이 벌렸다. 붕 뜬 기분에 ‘이러다 재벌 되는 거 아니야’, 스스로 자신감을 주체하질 못할 정도였다. 그러니 사업 확장을 염려하는 아내가 어리석어 보였고, 주위 사람들 충고는 모르는 사람들이나 하는 쓸데없는 걱정에 불과했다.
봄에 출하시킬 신발을 겨울에 미리 만들어 두는데 물건이 모자라 못 팔면 일생에 한 번 찾아올까 말까 한 기회를 놓친다는 생각에 아무 기준 없이 무조건 많은 물량을 선작업도 해두었다. 그런데 그게 사단이었다.
쉬/ 일어난/ 불은/ 쉬/ 꺼졌다.
어느새 유행은 지나갔고 덜컥 그 끝에 신발공장을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IMF까지 겹쳐 만들어놓은 신발은 출하도 시키지 못했다.
결국 공장을 하면서 번 돈보다 훨씬 많은 돈이 고스란히 빚으로 남았다. 급한 불만 끄면 곧 사태가 진정될 것으로 생각하고 부모님과 형제들, 친구들, 아는 사람들의 아는 사람들에게 빚을 졌다. 급기야 사채까지도 갖다 썼다. 빗나간 판단에 대한 결과를 인정하기 싫어 괜한 자존심을 부렸다. 빚을 갚기 위한 빚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늘었다. 아내는 도대체 써보기는커녕 구경도 못해본 그 많은 돈이 다 어디로 간 거냐며 허탈해했다.
늘어나는 빚만큼이나 식구들과 친구들의 원성도 점점 커졌다. 돌아가는 상황이 안 좋아질수록 서로 먼저 돈을 받으려는 빚쟁이들의 독촉도 심해졌다. 결국 원래 빚도, 새로운 빚도 어쩌지 못하고 빚쟁이들을 피해 단돈 40만 원을 들고 집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가족들 곁에서 버텨보려 했지만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한편으론 위기를 회피하고 싶은 약한 마음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나 때문에 집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 피해를 많이 봤다. 빚쟁이들이 들이닥쳐 집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놓곤 하는데, 이제 겨우 유치원에 다니는 아들에게 더 이상 험한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들이 빚쟁이들 악다구니에 불안해하는 모습을 그냥 볼 수가 없었다.
집을 나와 2개월을 고시원을 전전했다. 그러다 그나마 돈 관계가 없던 미장일 하는 친구를 따라 서울에서 대전으로 대구로 근 1년 반을 뜨내기 생활을 했다. 그동안 일거리를 찾아 이곳 저곳으로 옮겨다니느라, 또 혹시 빚쟁이라도 만날까 집 근처에는 가지도 못했었다. 명절 때도 마찬가지였다. 명절 때 부모님은 식구들 모인 틈에 이 빠진 사발처럼 비어 있는 내 자리를 보며 속앓이를 하셨고, 어느새 초등학생이 되었을 아들의 입학식에 가보는 건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다. 현관에서 “아빠” 하며 달려와 안기는 아들이 얼마나 그립던지….
한번은 아들이 너무 보고 싶어 모자를 푹 눌러쓰고, 얼굴은 마스크를 해 가리고는 집으로 갔다.
‘아 저기가 우리 집인데.’
하지만 아파트 입구에 서서는 곧장 엘리베이터를 탈 수도 없었다. 혹시 빚쟁이라도 마주칠까 겁이 나, 하는 수 없이 17층을 비상구 계단으로 오르는데 턱턱 숨이 막히고 입은 갈증으로 말랐다. 모자에 마스크까지 썼으니 한겨울에도 땀은 비 오듯 내리고, 마음에 짊어진 짐 때문에 걸음도 그리 무거울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가서는 행여나 아들이 빚쟁이에게 아빠 봤다는 소리라도 할까봐 깨우지도 못하고 얼른 자는 얼굴만 보고 도망치듯 집을 나섰다. 그때 나 자신이 그렇게 한심할 수 없었다. 땅이 잡아당기는 것도 아닌데 도무지 발걸음이 떼어지질 않았다.
그때가 미장일 하는 친구를 쫓아다니는 일도 그만두고 형이 운영하는 주차장 컨테이너 박스에서 숙식을 해결할 즈음이었다. 숙식만이라도 해결하면 그나마 조금이라도 돈이 더 모일까 싶어 결정한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 별반 상황이 나을 건 없었다. 그나마 잠잘 곳이 정해져 있고, 친구 신세를 안 질 뿐 여전히 형한테 얹혀사는 것이었고 돈도 모으질 못했다. 오갈 데가 없어 전전긍긍일 때는 먹고 자는 것만 해결하면 좀 나아질 줄 알았는데, 웬걸 외환위기의 칼바람은 못사는 사람에게 더 가혹했다. 어디 취직을 할 형편도 안 되는 막일꾼들의 수입은 하루 7만 원이던 것이 댕강 반 토막이 났고, 그나마 일거리도 베테랑 일꾼들에게 먼저 돌아갔다. 게다가 막일은 날이 궂으면 일거리가 없고 자재가 없어 공사를 중단하는 일이 허다했다. 그래도 없는 일거리를 찾아다니며 입에 단내가 날 정도로 일했다.
한겨울 옷 갈아입을 곳도 없어 공사장 한켠에서 땀과 먼지 때가 져 빳빳해진 작업복을 갈아입으려면 공기는 그렇게 찰 수 없었다. 또 살갗을 스치는 바지는 칼끝 저리가라 날카로웠다. 그런데도, 그렇게 일을 하는데도 빚을 갚기는커녕 밥 먹고 생활비라도 보낼 수 있으면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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